포스트스튜디오 아트의 담론과 이슈                  _ 김기수

 

I. 포스트스튜디오 아트의 역사적 맥락

미술은 오랫동안 특별히 지정된 공간에서 전시되고 감상되는 제도적 틀 속에서 발전되어왔다. 여기서 지정된 공간이란 다름 아닌 일명 화이트큐브라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1945년 참혹한 이차세계대전 격은 뒤 기존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면적 반성을 촉구하는 운동들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일련의 새로운 미술가들이 출현하여 기존의 제도적 틀 밖에서 다양한 실험적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Fluxus, Gutai, Situationist International, Conceptual Art, Performance, Land Art, Activist Art 등을 포괄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미술/예술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제기하며 - 기존의 미술개념(Academic Art & Modern Art)이 추구해온 심미성, 형식성, 표현성 따위를 거부하며 - 미술/예술의 기능과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려 했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에서 발전하여 오늘날에 성행하고 있는 미술운동들이 바로 공동체예술(Community Art), 공공예술(Public Art), 행동주의 예술(Activist Art) 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술운동들이 한국에서 과연 제대로 실행되고 있을까? 이러한 운동들은 어떤 담론과 어떤 이슈를 수반하고 있을까? 이글의 목적은 이러한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한국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공적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고 연구하는 기획자, 예술가, 이론가들에게 주요 쟁점과 논점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공예술, 공동체예술, 행동주의예술 등은 우선 포스트스튜디오 아트(Post-studio Art)의 맥락에서 접근 및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존의 익숙한 미술의 개념, 즉 아카데믹 아트와 모던 아트의 특징을 대변하는 스튜디오 아트(Studio Art)와 근본적으로 차별된다. 스튜디오 아트는 대체로 작업실에서 캔버스나 물감 또는 여러 가지 재료(돌, 철, 점토 따위)를 사용하여 새로운 이미지나 형태를 창조하여, 심미적, 형식적, 표현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스튜디오 아트(특히 모던 아트)는 흔히 동시대의 사회 현실과 별로 관계없이 성립할 수 있음을 용인한다는 측면에서 ‘자율적 예술’로 일컬어진다. 반면 포스트스튜디오 아트는 무엇보다 스튜디오 밖의 현실 사회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진다. 그리하여 포스트스튜디오 아트는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예민하게 통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동시대 세계를 깊이 천착하는 동시대 철학자들의 담론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전개된다. 이것이 왜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이 어렵고 난해한 이유이다. 포스트모던 아트(Postmodern Art)가 1980년대 서구의 당면 문제, 즉 페미니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상품물신주의 등을 다루기 위해 데리다, 푸코, 크리스테바, 제임슨 등의 이론이 필요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1989년 이후 컨템퍼러리 아트는 동시대의 지배 시스템인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되는 다양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동시대 주요 사상가들, 즉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바디우(Alain Badiou), 지젝(Slavoj Zizek) 등의 담론과 긴밀하게 관계한다.

II. 포스트스튜디오 아트와 민주주의

그렇다면 이러한 동시대 예술의 맥락에서 포스트스튜디오 아트(즉 공공예술, 공동체예술, 행동주의예술 등)은 어떤 담론과 이슈를 수반하고 있으며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할까? 동시대 (특히 지난 약 25년간의) 세계는 1980년대 이래 레이건-대처, 부시-블레어에 의해 추진된 신자유주의 체제와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인해 출현한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동시대 예술은 - 포스트스튜디오 아트로서 공공예술이든, 공동체예술이든, 행동주의예술이든 - 일반적으로 이러한 지배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을 다루는 것과 관계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특히 지난 사반세기 동안 서구와 비서구,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불평등을 가속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국가 내에서도 엘리트와 노동자, 남자와 여자, 중앙과 지방,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불평등을 가중시켜왔다. 요컨대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들은 민중이 주권자임을 공표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공화국(Republic)을 자처하지만 공화제도는 허울뿐 중산층은 무너지고 민중의 삶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동시대 철학자들이 진단하는 오늘날 세계의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사회의) 현실이며, 예술가들은 흔히 이로 인해 평등과 공생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너지는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하여 예술가들은 보다 민주적이고 공생적이고 평등한 삶, 사회, 공동체의 모델을 추구한다.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개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논란은 공공기관과 예술가들 사이에 빈번히 일어나는 것으로써, 전자는 합의(consensus)의 민주주의를, 후자는 불화(dissensus)의 민주주의를 전제하는데 기인한다. 동시대 예술가들이 다양한 형태의 공적 공간(public space), 즉 거리, 광장, 공동체 마을, 사이버스페이스 등에 개입하게 될 때, 이견을 가진 시민들 사이의 충돌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이때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식견이 요구된다.

우선 공공기관은 공익(public good)이라는 명목으로 공적 공간을 정치적 헤게모니의 방식으로 다루려 한다. 기관은 공적 영역에서 배제와 포유의 경계영역을 설정하고 공적 영역에서 시민들의 지각 및 행동 방식 등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공적 공간은 흔히 기관과 시민 사이의 대립(confrontation)의 공간으로 다뤄지고 논의되는데, 특히 민주주의가 위축되거나 억압된 상황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동시대 미술의 주요 작가나 이론가들은 - 랑시에르나 무페(Chantal Mouffe)와 같은 동시대의 주요 철학자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며 - 민주주의란 합의/일치가 아닌 불화/이견에 있다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공적 공간에 개입(intervention)한다. 요컨대,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원래 배제된 자들이 공적 영역을 주장할 때 성립하며, 갈등, 분열, 불안정은 민주주의적 공적 영역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존립의 조건들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주주의 사회란 갈등의 관계가 말살된 사회가 아니라 유지된 사회이다. 반목/대립이 없다면 부과된 권위주의적 질서의 합의/일치만 있을 뿐이고, 토론에 대한 억압은 민주주의에 대한 장애가 될 뿐이다. 여기서 반목/대립은 정치적 교착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유토피아의 필연적 전제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이론가들에 따르면, 인간의 주체성은 원래 (이성적이고 순수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탈중심적이고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변적 과정의 정체성을 갖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불완전한) 주체들 사이의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조건이며, 이러한 조건으로서의 갈등과 반목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시대 예술가들은 - 공공예술이나 공동체 예술 또한 행동주의 예술의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 관객들에게 ‘긴장’이나 ‘불안’ 또는 ‘불편’의 감각을 유발하는데 주저함이 없는데 이는 다름 아닌 기존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제도적 공간에 개입하여 새로운 틈의 장(場)을, 다시 말해, 민주주의적 공적공간을 개진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왜 동시대 예술이 - 다원주의적인 (따라서 일치/합의가 아니 갈등/대립이 공존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맥락에서 - 대체로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경향을 띠는 이유이다.

 

III. 포스트스튜디오 아트의 전략과 정치

이러한 관점에서 동시대 예술은 - 즉 포스트스튜디오 아트의 다양한 공적 프로젝트에 종사하는 한 - 일련의 새로운 전략과 형식을 창안하는데 전력을 다해왔다. 그것은 일찍이 제도비판 계열의 개념주의 작가들에 의해 다각적으로 탐구 및 개진되어왔다.

예를 들어, 보이스(Joseph Beuys)는 ‘사회적 조각’의 개념을 통해 도심에 사무실을 차리는 등의 방식으로 다양한 제도적 공간에 개입하는 새로운 예술적 전략을 창안함으로써 ‘직접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일반 관객들과 장기간의 열띤 토론의 장(場)을 개진한 바도 있고, 전쟁으로 황폐한 도시를 숲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바도 있다. 보이스는 예술이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또한 누구나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발휘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로 지칭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이러한 ‘사회적 조각’의 개념은 오늘날 공공예술이나 공동체예술의 이론적 모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유기적 통일에 근거한 확장된 예술의 개념을 통해 예술과 사회의 경계를 허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억압적인 체제, 즉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보다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사회를 건설하려했기 때문이다.

보이스의 혁신적 예술의 개념은 - 탈구조주의자 및 아감벤, 랑시에르 등의 동시대 철학자들의 ‘탈중심주의적이고 비본질주의적인 공동체’의 개념과 더불어 - 198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뛰어난 공공예술 및 공동체예술 프로젝트의 실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모든 (역사적 평가를 받은)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대게 ‘개입의 전략’을 통해 ‘정치적 공간’을 개진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 여기서 개입이란 다양한 형태의 공적 공간에 진입 또는 침투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기존의 것과는 다소 다르거나 이질적인 또는 낯선 형태, 모습, 행동을 띤다. 그리하여 개입적 예술 프로젝트는 관객들로 하여금 기존의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지각, 사유, 행동 방식을 촉구하는 것과 관계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정치적 공간’을 창안하는 방식이며, 정치적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방식이다. 동시대 예술이 관계하는 ‘정치’는 - 흔히 기존의 의회 정치인들이 추구하는 ‘권력’(power)과는 무관하며 - 언제나 민주주의나 평등의 가치와 관계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중요한 동시대 철학자들이 바로 랑시에르, 바디우, 무페, 지젝 등이다.

 

동시대 예술가들은, 특히 공공예술, 공동체예술 또는 행동주의예술에 종사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동시대 철학의 담론을 기반으로 어떻게 현재의 지배 시스템(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이 공동체 사회의 토대를 잠식하고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비판적 프로젝트를 줄기차게 창안 및 실행해오고 있다.

김기수 (디카/온아트 대표)

뉴욕주립대학교(SUNY-Binghamton)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재 디카(DICA)와 온아트(OnArt) 대표로서 강의, 논문, 세미나 및 전시 기획을 통해 ‘1989년 이후 현대미술’을 적극 소개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알랭 바디우와 현대미술」, 「랑시에르의 ‘비판적 예술’에 관하여」 등이 있고,

편저로 『CMCP』(2014)가 있다.